이어령-이재철 ‘지성과 영성의 만남' (1) 삶과 가족

▲ 대담 모습. 왼쪽부터 김종찬 사회자, 이어령 박사, 이재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회자) 첫 시간의 주제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죠. 첫 순간부터 삶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 삶의 울타리는 가족입니다. 삶과 가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앞으로 기약없는 시간을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이 뭐고 가족이 뭐냐 하는 개념부터 정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삶이라는 게 뭔지 간략하게 이어령 선생님께 먼저 질문드리겠습니다.


(이어령 박사)
다 아시다시피, 가장 쉬운 것처럼 생각하는데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문학을 50년 이상 한 사람인데 문학이 무엇입니까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거든요.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누구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삶이 무엇인가 하면 참 답변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젊은 사람들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뭘 안다 하는데 ‘ㄹ’, ‘ㅁ’이죠. 산다는 것도 ‘ㄹ’, ‘ㅁ’이 붙었어요. 아는 거하고 산다는 것하고는 많이 다르죠. 왜? 내가 한 여성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결혼해서 살아 보세요. 전혀 다르죠. 머리로 느끼는 게 앎이라면, 온몸으로, 뇌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던져서 얻어지는 게 삶이기 때문에 사실상 삶은 말할 수가 없다. 아는 것은 말할 수 있는데 삶은 말할 수가 없다. 체험해 봐야 안다.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형이 담배를 피니까 동생이 물었어요. 무슨 맛으로 피슈? 그 맛에 핀다. 그 맛이 뭐냐고 물으니까 그 맛에 핀다. 그 맛으로밖에 말을 못하는 것. 그렇듯 삶은 겪어봐야 합니다. 체험해 봐야 된다. 오늘 저는 되도록 신앙 얘기 안하고 이재철 목사님께서 하시고 오히려 안 믿는 옛날 입장에서 해야 이게 입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얘기를 안 하지만 사실 신앙은 아는 게 아니죠. 성경을 안다, 내가 기독교를 안다, 겁나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속에 뛰어들면 말로는 못하지만, 기독교라는 게 뭐냐? 크리스천이라는 게 뭐냐? 말은 못하지만 기도하거나 행동하면 알게 되니까 삶이 뭐냐? 던져 봐라. 번지점프 하지 말고 진짜 뛰어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사회자)
그런 면에서 오늘 이재철 목사님을 모신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겪어봐야 안다고 했는데 많이 겪어보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목사님,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이재철 목사)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할 때 그 대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실체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 대상과 상반되는 것을 같이 놓고 보면 우리가 요구하는 대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빛만 들여다보면 빛이 뭔지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 세상은 흑암이었습니다. 흑암이라는 배경을 놓고 빛을 보면 빛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 별들, 우주를 만드셨는데 코스모스(cosmos), 질서라는 뜻이죠. 질서만 들여다 보면 질서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코스모스를 만들기 전의 세상은 카오스(chaos), 혼돈. 혼돈을 배경 삼으면 코스모스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삶이 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대비되는 죽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삶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은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에 따라 할아버지, 아버지 순으로 태어나는데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치른 가장 어린 아이는 태어난 지 3일된 아이였습니다. 3일 된 아이도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장소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신혼여행 가다 사고로 돌아가신 부부도 봤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한자로 사(死) 자를 보면 한밤중(夕)에 비수(匕)처럼 날아온다는 뜻입니다. 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피할 수 있는데, 밤이니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이사야 선지자 말씀처럼 우리 코 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내뿜은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이죠. 죽음을 알면, 우리가 오늘도 하루 살았다고 하는데 실은 하루 죽은 것이죠. 50년 살았다고 하면 50년 죽은 것이죠. 우리 나이만큼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임을 알면,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사는 것 같은데 실은 매일 무의미하게 죽는 것입니다. 어느 날 호흡이 끝나면 자기 삶에 대해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에노스의 이름 뜻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때 생명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찾게 됩니다. 죽음을 알고 삶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생 사용 설명서가 됩니다. 그 사용 설명서대로 인생이라는 제품, 삶이라는 제품을 바르게 쓰면 그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노스의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서고, 그 죽음 앞에서는 여호와를 찾지 않을 수 없고, 참된 삶의 실체를 인생 사용 설명서를 통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삶입니까.


(이어령 박사)
모른다는데 자꾸 물어보시네요(웃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재철 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겠구나. 오른손이 뭐냐? 왼쪽의 반대죠. 성경에 코스모스, 카오스가 나오는데 창세기 참 읽어보면 저런 게 영성의 세계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나는. 우리는 빛 아니면 어둠이지요.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니고,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만 문학하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술가는, 문학가는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질문을 주고, 있는 것을 표현할 뿐. 나는 슬퍼하는 것 밖에 못해요. 슬픔이 뭐냐? 아프다는 게 뭐냐? 의사나 심리학자는 알아도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보면 해답이 이뤄지는 것은 사실상 매력이 없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런데 욥이 하나님하고 네가 믿는, 부인이 얘기합니다. 한번 저주하라는 거죠. 용기를 내서 한번 저주하라는데 얼마나 실감납니까. 예레미야애가에서 절절한 슬픔을, 얼마나 실감납니까. 해결하는 것은 매력이 없어요. 자꾸 시 분석을 해 주는 것은, 시가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거. 기호학처럼 해 보면 무지 어려운 시를 쉽게 알 수 있어요.

하이네(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1797-1856 독일의 문호)가 ‘떠납시다, 그대와 나’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시에서 보면 그 시간이 언제냐, 저녁 노을이 번져갈 때. 저녁이 번져가는 시간에 갑시다. 저녁이라는 게 뭐에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죠. 그러면 그 저녁을 뭐라고 비교했냐면 환자처럼, 어떤 환자냐? 침대 위에 누워있는 마취된 환자처럼. 이 사람 죽었어요?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있잖아요. 저녁 황혼에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라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과 황혼이 번져 간다. 어떤 골목으로? 반쯤 폐허가 된 길거리로, 그대와 함께 갑시다. 이게 삶이죠.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고. 그 어렴풋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빛을 구하고 어둠을 구합니다.

여러분들께서 희랍과 헤브라이즘 보면 정말 반대, 아까 참 좋으신 말씀이 헬레니즘을 알아야 헤브라이즘을 알아요. 희랍을 너무 좋아해서 절대 신인 기독교를 버리고 희랍 신을 그렇게 좋아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죽기 직전에 루브르박물관 비너스 상에게 안겨요. 평생 희랍의 여러 신을 믿으니까 비너스가 자신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는 거에요. “너는 나한테 매달리는데 나는 널 구할 힘이 없어. 야, 나 팔 없지 않냐. 너를 안아주고 싶은데 팔이 없어. 너무나 너희들과 차원이 같아.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해 줘도 너희들을 끌어줄 수가 없어.” 그때 하이네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이 못하는 것, 잡신들이 못하는 것, 두 팔을 뻗어 우리를 끌어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범신론자이던 하이네는 죽기 전에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두 팔로 끌어안는 게 아니면 내 삶은 안 되겠다. 하이네의 지성은 이재철 목사님께서 얘기하신 삶과 죽음 거기서 보여지는데, 우리는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방황하며 괴로워하는 거 이것이 지성이고. 어떤 게 빛이고 어둠인가 아는 것, 알 정도가 되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죠. 생사를 넘어서야 생사를 볼 수 있는데, 이재철 목사님은 정말 어느 정도 넘어서신 것 같아요. 이런 게 대화 아닙니까.


(사회자)
그럼, 영성의 입장에서 바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재철 목사)
바로 산다는 절대 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전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과 의도에 맞춰 사는 것이 바른 삶이죠. 그 기준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죽음을 알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좇는 자들에게는 성경이 인생 사용 설명서죠. 모든 사람들은 고가 제품을 구입할수록 철저하게 제품 사용 설명서를 숙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제품의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그 의미를 절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떤 제품보다 인생이라는 제품을 하나님의 인생 사용 설명서대로 사용하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죠. 그러니까 바르게 사는 것은 그 분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박수).


(사회자)
박수치기 어렵지 않습니까? 너무 어려워서. 삶이라는 것을 최초로 살기 위해 이곳에 와서 만나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그런데 집 가(家에) 왜 사람이 아니라 돼지(豕)가 들어가 있을까요.


(이어령 박사)
지붕(宀) 밑에 있는 게 육달월 돼지 시(豕). 저도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 인(人) 자를 써야지 왜 돼지를 썼냐는 거에요. 돼지처럼 살아라? 그런데 이게 참 재밌어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옛날 사람들은 동굴 같은 데 살고 돼지는 나가면 안 되니까 우리 안에. 처음에 집을 만든 것이 지붕도 하고 돼지를 위해, 그러다 사람도 집으로 들어갔다는. 그래서 돼지가 들어있다. 엉터리 얘기일 수 있지만, 가정을 뭐로 봤느냐? 먹는 것으로 봤습니다. 경제적인 것, 먹는 것.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가족을 정의할 때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는 같이 먹는 거다. 그게 가족이다. 빵을 먹는 거다. 경제적 기반이 가족을 만들었죠. 짐승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먹는 공동체, 세 끼를 해결해 주는. 그래서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돼지, 양식이니까.

어떤 사람은 아니다. 돼지 자를 쓴 것은 번식하는 것. 왜 결혼하냐? 왜 먹느냐? 애를 키우고 낳기 위해서가 아니냐. 다복한 사람은 애를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가정으로,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 왜 애를 많이 낳는지는 성리학으로 보면 금세 이해가 가죠. 무조건 한 집안에서 돼지만큼 많이 낳는 게 없으니까 생식의 의미. 가정이란 결혼해서 애 낳는 번성, 모래알처럼 번성하라. 낳아라, 불려라. 생식. 가정이라는 것은 생식하는 것이다. 자식 낳고 손주 낳고 많이 낳아서 다복하게 사는 것이다. 경제학적 아니라 생물학적인 의미입니다.

마지막, 사실 이게 정답이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제사 지낼 때 돼지 잡지 않습니까? 유목민들이 싫어해요 돼지를. 농경 사회에서는 반드시 돼지를 제물로 바칩니다. 유목민들은 양을 바치죠. 돼지를 바치는 조상들의 집, 교회당 같은 것, 종교의 공간이죠. 가정이란 먹고 자고 애 낳는 곳이 아니라 조상들에게 돼지를 바쳐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당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는 종교적 이념적, 신성한 곳입니다. 이게 사실 정답이죠. 돼지를 잡아서 제사지내는 곳이 사당이었고, 이것이 오늘의 제사다. 가정이 존재하는 세 가지를 얘기했죠. 경제적 공동체, 생물학적 장소, 마지막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가정에 속하는지, 우리는 어떤 돼지를 추구하는지,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사회자)
성경에서도 가족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이재철 목사)
한자를 보면 사람 인(人) 자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대 있죠. 인간이라고 하는 한자 글도 인간 사이, 그게 인간입니다. 헬라어로는 안드로포스인데 남자를 가리키는 아네르와 눈을 가리키는 포스가 합해진 말입니다. 남자가 있고 그를 보는 눈이 있다. 결국 두 사람이죠. 이 세상은 한 사람으로 살 수 없고, 전부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글자가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 다석 유영모 선생은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삶도 사람 안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산다면 삶에 대해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문제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데, 그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라는 것. 자기 헌신을 통해 사람을 몸에 익히는 장소, 타인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익히는 곳,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배양하는 곳도, 기본적인 예의범절, 윤리도덕을 익히는 곳도 출발점이 가족이죠. 그래서 가족과의 출발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첫 번째 나오는 책을 창세기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이라고 하는데, 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는 2장에서 끝나죠. 3장부터는 가정을 세워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셨다가, 타락함으로 노아의 가정을 세우셨다가, 바벨탑 사건으로 타락한 이후에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시는 창가정기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이죠. 국가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기본 단위인 가족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고, 병든 사회는 결국 가족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삶의 문제는 실은 어그러진 가족 관계의 산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이 두 기둥으로 우리 믿음의 축이 이뤄지는데, 사람 사람의 출발점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니까 성경이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회자)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고 출발점이다. 포인트가 되는 말씀인데, 기본적인 단위이고 출발점이 되는 가정이 늘 건강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첫 번째 도전이 지성적이고 영성적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돼지라고 말했는데 먹고 사는 문제 해결 안 되면 참 이 기본적인 단위 출발점이 흐려집니다. 경제적인 문제, 사람들은 다 성공해야 된다고 하는데, 성공이라고 할 때도 영성이 훌륭해졌다고 말하지 않거든요. 저 사람은 먹고 살기 힘든데 교회만 다닌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학교를 보내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이 가정의 성공이 되는 이 시대에 이 문제를 이재철 목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이재철 목사)
인생살이에서 성공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가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성공이 어떤 길 위에서의 성공이냐가 먼저 증명돼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낚시로 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어부에게는 밤을 새서 월척을 낚는 것인데,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시간 낭비입니다.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 하는 사람이 책상 앞에서 밤을 새워 책을 읽는다, 이것도 실패한 삶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성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고 땅 한 평도 가지신 적이 없고 단돈 1원도 없었고 재산도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사도 바울은 참수형 당했고. 지금 관점으로 보면 다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분들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구별된 길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다시 한 번 재확인해야 되는 것이죠.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여러 가지로 대답하니까, 너희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께서 반석과도 같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천명하셨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제도도 아닌,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성령 하나님으로 믿는 모임입니다. 이까지는 다 아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한 규명이 또 한번 더 필요해집니다.

주님께서 그 고백을 받으신 장소가 벳세다 들판이나 심산 계곡이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받으셨습니다. 이곳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 신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황제의 칭호 가이사랴와 자기 이름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붙은 도시가 여럿 있었는데 아무 도시에나 붙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는데 상당 규모 이상의 도시여야 하고, 두 번째 조건은 그 도시의 한복판 혹은 가장 중요한 지점에 황제의 신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인간으로부터 경배받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황제의 신전 앞에서 베드로는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당신이 신이라는 것이죠. 3권을 장악한 로마 황제가 자신의 경제력이나 힘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사렛 예수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은 황제의 논리, 욕망의 논리, 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버림, 자기 헌신, 자기 비움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길을 좇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황제의 길이냐, 예수의 길이냐, 이 갈림길에서 황제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좇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를 버리고 영원을 얻는 길인데, 로마 황제의 모든 흔적은 지금 폐허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주로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1절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하십니다. 그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짧은 시간에 많은 말을 효율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어를 보면 건져 올리라는 얘깁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시간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는데, 그 시간이 되기까지 자기 욕망으로 물거품처럼 시간을 날린 사람도 있고 그 시간을 영원으로 건져올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은 누군가. 황제의 길에서 갖는 부와 명예를 갖지 못하더라도 영원을 건져올린다면 성공한 사람이죠. 이 길을 가면서 세상의 것은 다 갖췄는데 영원을 갖지 못했다면 이 길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사회자)
아는 것, 하지만 영원은 멀고 현실은 가깝습니다. 사는 건 다급하고, 그래서 왠지 계단을 내려가서 영성보다 지성 쪽에 가서 들러붙고 싶은 심정인데요. 지성은 이렇게 과부하 걸리게 안 하시겠죠.


(이어령 박사)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인류학자는 가정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사냥을 해서 배가 고파요. 토끼를 잡았어요. 가족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토끼를 잡아서 먹을 거에요. 그런데 자기 배고픔을 참고 자신의 먹잇감을 짊어지고 가는 것. 어디로? 가족이 있는 곳으로, 이게 가족이다. 이게 물질이고 먹는 것이 전부이고 경제 문제 출세 문제 물질의 문제가 중요하다면 짐승들처럼 그 자리에서 잡아 먹을텐데, 왜 그 무거운 것을 끌고 가는가. 이게 가족의 출발입니다. 끌고 간다, 이게 사랑이죠. 식욕하고 사랑하고 누가 이겼냐. 이래도 예수님 말씀이 틀렸습니까? 가족은 절대 희생과 헌신이 아니고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시장의 논리와 피의 논리와 돈의 원리가 같다면, 시장의 원리가 가족의 원리라면, 가족의 성공이 사회의 성공이라면 우리 가족은 그 날 없어집니다. 왜? 우선 자기 부인하고 결혼했는데, 결혼할 때는 날씬했는데 살다 보니까 막 살이 쪘어요. 제품을 샀는데 며칠 후에 그렇게 바뀌면 리콜 안합니까? 살다 보니 영 아니다, 가져가라. 애가 대학을 시험 쳤어요. 다른 애들은 다 잘 쳤는데 너는, 너 아니고 다른 애 데려다 쓰겠다. 사회는 좋은 물건 있으면 나쁜 물건에서 바꿉니다. 하지만 자식은 못났어도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바꿔서 할 수 없죠. 못났어도 자기 자식이니까.

그래서 아담 스미스도 시장 원리로 맡겨두면 다 잘 되지만 한 가지는 다르다. 가족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욕망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을 번성하게 하지만, 시장 원리와 다른 게 하나 있다, 그게 가족의 원리다. 피의 교환, 돈의 교환, 마지막에 말의 교환. 이게 3대 교환입니다. 피의 교환은 남녀가 결혼해요. 사랑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요. 이걸 가정이라고 부릅니다. 돈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써서 교환한다. 시장이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는 소통, 요즘 인터넷이나 전화 등이 소통의 자리에 있지요. 이 3대 교환인데 말이 안 통하면 얼마나 답답해요. 돈이 안 돌면 시장이 얼마나 황폐해요. 피의 교환이 없으면 그날로 자손이 끊깁니다. 이 세 가지의 원리가 다른데 다 필요합니다. 말, 돈, 피, 그런데 어떤 걸 우선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어느 가정이 시장 원리로 했으면 그 가정은 돈 못 버는 아버지는 이혼하고 내쫓기고 안 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이니까. 시장 원리로 보니까 남편이 쓸모없으면 시장 원리로 가정 원리를. 돈 못 번다고 어떻게 가장을 내쫓냐. 사랑이 없는 가정은 주식회사일 뿐이죠. 지금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예수님은 가족으로 보면 실패한 사람이죠. 어머니 속 얼마나 썩였겠어요. 동생은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서는 가족의 사랑과 전혀 다른 얘기를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유교에 젖어있는 한국 사람이 가장 갈등하는 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과 가정에서 말하는 사랑, 조상을 섬기고 효를 다하고 가족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바깥에 형제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언짢은 소리 하시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이 나의 형제이니라. 왜 자꾸 가족이 아니라고 얘기하느냐. 돌아가실 때도 그러시잖아요. 여자여 보거라. 당신의 아들을 봐라. 제자들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기독교 욕하는 사람을 신주 모시듯 한다. 세상에 불효막심한, 어머니가 울면서 찾아왔는데 여자야, 저 사람이 당신 아들이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지만 뒷구절 보세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기에 너희 어머니가 있다. 당신이 나만 아들로 생각하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여기 있지 않습니까. 다 내 아들로 보면, 가족보다 더 큰 사랑을, 이웃까지 가져가면 자식을 잃은 슬픔이 가시지는 않지만 자식을 잃은 것은 아니다. 왜? 그와 같은 자식들이 있다. 그래서 마리아를 모셔다 어머니로 섬기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옛날 믿었던 가족관이 기독교를 믿고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가족관이 기독교를 믿음으로서 더 정확하게 해석됐습니다. 가족이 시원찮고 어머니가 시원찮으면 여기 어머니가 있다고 했겠느냐. 제일 중요한 것인데, 그걸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귀중한 가치밖에 모르는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모르니, 아들에 대한 것을 자꾸 크게 해 봐라. 그러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에서 성공했다는 것은 바로 사랑을 가지면 자기 가정이 불행하고 누구를 잃어도 사실 사랑 안에서 보면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 주인데 두 번째는 역시 먹을 게 있어야 된다. 솔직히 먹을 게 없으면 교회도 못 나오고 헌금도 못 하잖아요. 무엇이 우선이냐고 하면 사랑이 먼저죠. 먹는 건 기본이고 그 위에 사랑이 있어야죠. 사랑이 없고 먹는 것만 있으면 사람이 아니잖아요.

한 가지만 더 얘기할께요. 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가정에서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다. 내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 얘기입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콩알 하나 남겨놓으신 것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5형제, 7남매가 아버지 산소에 가서, 1백세를 사셨어요. 큰형들 쭉 있는데 제가, 우리 아버지가 많은 걸 남기고 가셨습니다. 큰 형이 듣기 거북하다는 거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게 받으신 거잖아요? 뭘 받아? 아무것도 안 주셨기 때문에 화기애애하게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취사병풍만 하나 있었어도 저거 누가 가져가나 야단났을 것 아닙니까. 서로 화내고. 사랑을 주셨다. 재산을 남기시고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우리에게 큰 집을 줬으면 유산 때문에 대판 싸움 났을 것이다. 이래도 여러분들이 가족의 절대적인 것을 부에다 놓겠느냐. 돈에다 놓겠느냐? 그러면 참 가족이 불행하죠. 돈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항상 사랑이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 진리라든지 이걸 뒷받침할 수 있는 돈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읽은 범위에서 성경에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고 가난한 사람이 최고라고, 진짜 성경 갖다놓고 저와 얘기해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not only 라고 했지 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너무 예수님을 사랑한 나머지, 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돈이나 이런 걸 밝히면 안 되고 경제적인 것 싹 무시해야 된다고 하면 안 된다. 언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나. 더 쉽다고 했죠. 유혹이 많으니까. 이 구절이 말썽이 많은데. 실제로 그 시대에는 낙타가 들어가는 조그마한 성이 있었다고 해요. 들어갈 때 짊어진 것들 다 내려놓고 들어갔어야 했대요. 무릎 굻고 기어서 들어가야 한다. 사실은 아니고, 자꾸 말하고 싶은 것은. 기호학을 했는데 더 쉬우니라. 더 어려우니라 했어도 겁나는데 더 쉽다고 했으니 기본은 되고 천당 가는 건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여러분들이 너무 많은 돈을 가지면 아까처럼 재앙이 올지 몰라도, 최소한 착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남에게 베풀 수도 있고 가족들이 덜 싸우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부는 땀 흘려서 버는 부는 돼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여러분이 가족이라는 어원이 돼지였잖아요. 패밀리(family)의 어원이 뭐에요? 라틴어로 서비스. 남자 노예라는 말이 세르무스. 여자 노예라는 말이 세르바. 영어로 하면 남자 노예는 파밀라스. 여자는 파밀라. 노예라는 뜻이에요. 가족이 노예 집단을 뜻하는데 노예들이 점점 없어지고 자기 손으로 일하게 되니까 가족을 어머니 아버지 아들이 다 사용자들, 머슴들 일하는 집단이 패밀리였는데 없어지니까 이 가족 집단이 패밀리가 된 거에요. 노예가 하는 일을 대신하게 된 거에요. 가족은 사랑이 넘쳐나는 존재지만 공동 작업을 하는, 서로 같이 해야 합니다.

농업 사회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까지 함께 일했어요. 그런데 땅 많은 사람들이 자꾸 땅을 늘이니까 쫓겨난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옛날 가정은 생산하는 곳이었는데, 도시화·산업화되니까 가족은 이미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소비하는 곳이 됐습니다. 남자 혼자 가서 취직해서 벌어오면 가족은 기다리고 있다가 먹는 거죠. 농업 시대에는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의 성적 문제로 점점 남자는 바깥에서 일하고 여자는 안에서 일하고 애들은 완전히 부모님이 보호해 주고. 부양 가족에 대한 한 사람이 전체 가정을 맡게 됐고, 임금제라는 게 생겨서 여기서부터 임금제의 모델이 생기죠.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식구가 10명이면 10명분을 줘야 하니까 임금 투쟁이 생겼다. 가정은 농업사회 산업사회 지식정보사회가 다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가정은 노예 제도를 뜻했던 것이 가족 단위가 되고 점점 변해서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몇만 년 동안 가족법이 자연법은 국가법보다 우선했죠. 제일 먼저 생긴 법은 가족의 법이었다. 국가보다 나라의 집, 국가도 집 가자 썼습니다. 집의 단위, 이게 최우선한다. 농업 사회는 가족이 생산하는 단위였다. 산업 사회에 들어가면서 소비의 단위로 전락했다. 내가 얼마만큼 사람들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가 남자들의 프라이드요 자기의 지위요 힘을 과시하는 것이니까, 그 때부터 돈을 많이 가져가는 거죠.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더 큰 다이아몬드를 사 주느냐. 남자들이 경쟁사회에서 나는 이만큼 가족을 잘 살게 만들었다, 이 경쟁이 시작되면서 누가 더 많이 소비하느냐에 따라서. 가정이 어느새 허영의 장소가 되고 시장 원리도 아닌데 물질이 기준이 되면서 누가 더 큰 집을 짓느냐, 이것이 남자의 출세 기준이 돼서 어리석은 남자들이 실컷 벌어서 부인 사 주는거죠. 남자들이 출세하는 것 별로 원하지 않는데 부인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개 아버지는 계장인데, 미치는 거죠. 자기는 원하지 않는데도 해야 합니다.

출세하면 훨씬 더 괴로운데. 호메로스에 나오는 가장 슬픈 장면이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투구를 보고 운다. 알아보지 못하는 거죠. 부인이 말합니다. 가까운 나뭇가지를 따지 못하고 왜 높은 가지의 열매를 따려 하십니까. 출세라는 것이 사실은 가정을 위해 출세하려고 하는 기준이 생산의 장소가 소비의 장소로 되고 부양이 남자의 의무처럼 되니까 한 번 사는데 당당하게 사는 것은 결국 필요없는 부와 사치까지 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려 가면서 노동하는 산업주의적 인간상이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황폐해지고 붕괴되는 조짐이 되고 나아가 산업사회부터 지식정보사회로 나오면서 점점 사회가 부패해서 가정이 붕괴되면서 결론 부분에 나오겠지만 이제는 가정 삼각형, 아버지 어머니 아들. 절대 삼각형, 핵가족으로 넘어갔습니다. 아버지 혼자 살거나 어머니 혼자 살거나 부부만 살거나 자식이 없는, 삼각형이 완전히 찌그러진. 전 가정의 40%에서 가정 삼각형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주기도문도 없어집니다. 아버지가 없어지는데,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심각한 얘기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삶에서 오늘 이렇게 깊은 가정의 병든 가정을 갖고 있는데 겉으로 나가면 창피하니까 다 행복한 척 하고 하지만 들리지 않게 TV 켜 놓고 막 싸우죠. 이런 말하자면 각자 지니고 있는 가정의 문제들을 오늘 밤에 다 말씀할 수 없겠지만 털어놓고, 나만의 죄가 아니구나. 여기에 문명을 보고 새롭게 사회를 고쳐 나가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들 가정은 다시 몸이 아플 때만 기도했는데 정신이 행복해야지만 행복하겠구나. 영성은 이미 이 단계를 초월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길게 얘기합니다. 이런 아픔을 놓고 기도할 때 영성이 찾아온다. 지성은 고민을 표현하는 것,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것은 영성의 소관입니다.


(사회자)
삼각형이 무너졌다고 말씀하셨는데, 부부 간에도 무너지는 일이 많습니다. 이혼하고. 아예 혼자 살겠다, 자녀를 안 갖겠다. 가족 형태도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목사님, 이혼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이재철 목사)
마태복음 19장 보면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예쁜 여자와 결혼했는데 헤로디아, 자기 제수를 아내로 빼앗았죠.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하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동생으로 억지로 이혼하게 하고 그 여자를 빼앗은 것. 그 잘못을 세례 요한이 지적했다가 참수형을 당합니다. 시기적으로 그 직후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혼해도 된다고 얘기하시면 세례요한보다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당하고,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들어 모세는 이혼 증서 써 주라고 했는데 왜 율법을 어기느냐?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 율법이 금과옥조였는데. 예수님께서 어느 쪽으로 답변해도 매도당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대답이 창세기 2장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지 않았느냐.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지만 그 결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지 못한다. 원칙적인 답을 주신 것이죠.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박했습니다. 율법에 분명히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라고 돼 있는데 왜 율법을 어기느냐. 예수님께서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명기 24장 1절에 보면 모세가 만약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기뻐하지 않거든 그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서 자기 집으로 보내주라. 그러니까 인간이 다 하나님과 같이 완벽한 성자라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인간이 부족하고 완악하기 때문에 남자도 보호하고 여자도 이혼 증서를 써 줘야 재혼할 수 있으니까. 여자도 보호하기 위해 완악한 인간을 위한 차선책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라는 거죠.

이후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를테면 샴마이 학파는 그 수치스러운 일이 뭐냐? 이 일은 간음, 음행, 이런 굉장한 일이다. 이런 경우 가차없이 이혼 증서를 써도 된다. 어떤 학파는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밥을 태우는 것, 빨래를 잘못 해도 포함되고 마음에 안 드는 것도 포함되고 무슨 사유든지 다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인간들을 위해 차선을 주신 것을 인간들은 마치 면죄부가 돼서 그것만 써 주면 모든 이혼이 합리화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시면서 어떻게 끝을 맺으시느냐 하면,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데 장가가는 것은 다 간음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음행하는 죄를 범했을 경우 헤어질 수도 있다고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언뜻 보면 샴마이 학파의 편을 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샴마이 학파의 주장과 예수님 말씀은 전혀 달랐습니다. 단 한 번의 음행만이라도 이혼의 이유가 된다고 봤는데 예수님의 음행이라는 단어는 지속적인 음행을 의미했습니다. 그 명사에서 파생된 동사는 몸을 판다는 얘기에요. 매춘부가 몸을 판다. 거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포르노. 결혼한 사람이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매일 음란한 생각 속에서 다른 집사람과 음란한 관계라면 영혼이 죽은 사람 아니겠느냐. 그런 경우라면 말하자면 헤어져도 좋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간접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이혼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서도 똑같이 문제가 됐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서 모세가 그런 율법을 말했다고 하는 자체는 출애굽 직후부터 이혼의 문제가 대두됐다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세운 교회에서도 이혼이 큰 문제였습니다.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가니까 결혼한 부부 중에서 한쪽은 믿고 한쪽은 안 믿는 거에요. 믿는 남편과 믿지 않는 아내 간에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서 신앙을 위해서라면 갈라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뒤에 토를 붙였습니다. 아내된 자들이여, 네가 혹 네 남편을 구원할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들이여, 네가 혹 네 아내를 구원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나는 믿는 남편이고 아내는 안 믿는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로로 삼으셔서 내 아내를 구원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일이라도 나를 도구 삼아서 남편을 구원할 수 있다.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할 수도 있으나 함부로 하지 말라. 정말 사려깊게 생각하고 해라는 의미죠.

저는 이제 목회자로서 목회는 다 교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니까 정말 어떤 이혼 문제를 갖고 결혼하는 교우님들과 상담하면 당신을 통해 남편이 혹은 아내가 구원받을지 어떻게 아냐. 더 참자. 그렇게 권면하고 기도드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정말 피치 못하게 정말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을 때는 고린도전서 7장을 놓고, 이제 끝난 것 잊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에 신경쓰자 하고 위로해 드립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어떤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합니까. 해답을 갖고 계십니까.


(이재철 목사)
하나님께서 아까도 말씀드렸듯 남자와 여자를 결혼시키시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만드시고 결혼시키시잖아요? 결혼의 정의를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한 가정에서 같이 삽니다. 부모와 자식은 한 몸을 이룰 수 없죠. 1촌입니다. 형제는 같은 부모 밑에서 났는데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2촌입니다. 둘이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대상은 남편과 아내 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남자와 아내가 정말 바른 결혼 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0촌의 관계를 지키는 것, 0촌이 돼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남편에게 있어 아내가 0순위여야 하고, 아내에게 있어 남편이 0순위여야 합니다. 그런데 보면 결혼한 남자가 자기 부모하고는 0순위를 갖고 아내에게는 1순위를 두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자기 친정 식구들하고 0순위이고 남편이 1순위, 자식을 0순위로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까 선생님께서도 오늘날 가정의 어려움을 얘기했지만 요즘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로부터 0순위 대접받는 가정이 드뭅니다. 남편에게도 아내가 0순위인 곳이 드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위해 밖에서 남자가 일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도 중요하죠. 그러나 선택의 문제가 될 때 아내가 0순위가 돼야 하고 남편이 0순위가 돼야 합니다. 그 때부터 부부가 정말 한 몸을 이루고 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서로의 0순위가 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얼마 전 어떤 자리에 갔는데 어떤 부인이 이런 말씀 했다. 음식을 정성스럽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남편이 먹는 걸 보면 미워 죽겠대요. 자식이 먹도록 못 먹게 한다는 거에요. 그 분에게 남편은 0순위가 아닙니다. 0순위가 아니면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고, 그 관계가 아닌 가족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자식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0촌의 관계, 0순위를 지킬 수 있는 동기는 믿음입니다. 그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이죠.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나와 한 몸을 이룰 대상으로 내려주셨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상대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셨기 때문에 함께. 나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새로운 존재로 한 몸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믿으면서 부부가 한 배를 타고 갈 수 있다. 그럴 때 자식에게도 전도돼 갑니다.


(이어령 박사)
조금 오해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일부일처제가, 이 삼각형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우리가 핵가족화가 지금 생겨난 것으로 아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적 없지만 서양 패밀리로 보면 로마 제국이 망하면서 11-12세기 성을 놓고 싸울 때 성과 속이 부딪쳤습니다. 가장 격화된 것이 그레고리우스 7세 때, 결혼 제도가 이때 기독교의 원리로 등장합니다. 개개인의 세속까지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결혼 제도였습니다. 성 권력이 속세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12세기 때 로마법하고 희랍과 성경을 합쳐 만든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핵가족을 단위로 한 가족 단위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창세기에 있지만 우리가 지금 절대시하는 개념, 핵가족화의 삼각형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라 12세기 세속과 성권이 싸웠을 때 제도화된 거에요. 그게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잘못 들으면 그러니 이혼해도 된다, 일부일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는데 사실 구약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었죠. 하얀 드레스도 최근부터 입었습니다.

청교도들 참 힘들었습니다. 웃기만 해도 종교재판에 끌고 갔다. 당신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냐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얘기하지만, 그러니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죠. 인간이 완벽히 희생할 수 있으면 예수님이 뭐하러 십자가 지셨겠습니까. 이걸 변명으로 삼으면 안 되겠지만. 형식적으로 이혼하지 않고 완전히 원수 삼아서 아침 저녁으로 원수 하고 사는 것보다는 이혼하는 것이 훨씬 정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혼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죠. 이혼하지 않았어도 훨씬 악마들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혼을 했지만 그래도 이혼한 다음에도 누가 어떻게 되면 쫓아가고 사랑이 남은 사람이 있어요.

인터넷 보면 두 늙은 부부 얘기가 나오는데 이게 해답이 될 거에요. 젊었을 때는 참고 살았는데 도저히 못 살겠으니까 이혼하러 갔다. 변호사와 가서 이혼 서류 다 끝냈다. 돌아오는데 변호사가 그래도 한 5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 있느냐, 어디 가서 삼계탕이라도 먹고 갑시다. 둘이 갔는데 으레 하던 버릇대로 남편이 닭 날개 찢어서 줬어요. 부인이 이혼하고서도 그러냐? 당신하고 살 때 닭날개만 먹었는데 또 닭날개를 주냐? 닭날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 그랬지 진짜 닭날개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닭다리 좋아하지. 오해였다. 얼마나 섭섭했겠나 싶어서 전화했는데 안 받아요. 얼마 후에 그때 전화 받을걸 하고 보니까 곧 병원 실려 가서 죽었다. 이게 떠도는 얘기인데, 이혼하라 마라 얘기가 아니고. 왜 이혼했는지, 이혼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잘 나타내 줍니다. 서로 믿음이 있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면 닭날개를 줄 때도 좋아서 했나보다, 양보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됐으면 안 그랬을텐데. 소통이 안 된다. 오늘날 한국 가정이 왜 이렇게 이혼이 많으냐. 조선 시대부터 이혼이 많았다. 그 때는 할 수 없이 같이 산 거고 지금은 이혼하는 거고. 이혼율이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죠. 우리 부부생활의 패턴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 사랑 소통으로 바뀌지 않으면. 말투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양 부부들은 아무리 늦어도 키스 하고 출근합니다. 서양에서는 이혼할 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 안한지 얼마 됐느냐? 판사가 그걸로 결정한다. 또 하나는 애들하고 야구장에 안간 것이 얼마 됐느냐? 지금 괜찮게 사시는 분들도 미국 재판소 가면 다 이혼 당합니다(웃음). 한국 사람들은 사랑 안 해서 그러냐? 아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고 사랑한다고 하면 닭살 돋고. 하지만 서양 사람들처럼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혼 안하는데 그런 패턴을 안 거치니까. 제가 국문학 하고 언어학 하는 사람인데 부부지간에 대화하는 법을 몰라요 우리들은. 가까우니까 막 해요.

지난 시간에 했어요. 남편은 죽어라 일하고 왔어요. 목이 마른데 집에 오니 아내는 전화통에 앉아있어요. 화가 나죠. 전화만 잡고 있다니. 사실 괜찮은 여자죠. 전화통만 붙잡고 있으면 굉장히 괜찮습니다. 밖으로 나다니지도 않는 거잖아요. 물 떠오라고 합니다. 아내가 주스 줄까? 하면 해피엔딩인데 떠 주려다가도 화가 나니까, 손이 없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데 왜 부부끼리는 안 되는가. 저도 배운 사람이고 현대인이라 하면서도 편지 쓰면서 당신 보고 싶어 절대 몰라. 집사람도 마찬가지로 옛날처럼 못 하는 거죠.

그리고 부부는 영화와 다르다. 영화는 무성영화부터 시작했다. 말이 없다가 흑백이다가 칼라 천연색, 지금은 아바타, 3D까지 왔어요. 결혼은 반대입니다. 처음에는 아바타, 막 입체적입니다. 조금 살다 보면 이제 평면이 됩니다. 더 살다 보면 색채가 없어지죠. 흑백이 돼도 힘든데 말이 없어집니다. 부부싸움 하면 상당히 양호하죠. 말이 없어요. 조금 있으면 행동도 찰리 채플린 영화처럼 이상해집니다(웃음). 결혼의 역사는 갈수록 정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고,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 소통으로. 공통의 목표가 있으면, 부부가 같이할 수 있는 공통의 목표가 있으면 그렇게 안 됩니다. 자식과 부부 세 사람이 적어도 테니스만 같이 치고 다녀도 그렇게 간단히 이혼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소비만 하니까 월급이 온라인 입금되면서부터 남편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터키 같은 데 가 보면 외판원들이 모두 장모님, 장모님, 이모님 합니다. 고모님은 없어요. 경제권을 쥐고 있습니다. 유명한 얘기 있잖아요. 아버지가 와서 보니까 자식이 형편없는 거에요. 자식 다음에 부모 다음에 강아지 다음에 가정 다음에 남편이 다섯째. 너무 기가 막히니까 편지 쓰고 왔습니다. 다섯째야, 여섯째 간다.

이 말이 왜 생겼습니까. 경제 외에는 소통할 것이 없어요. 시장 원리가 지배하니까 온라인 계좌로 돈 쥐는 사람 되니까. 남편이 자동차 사려고 하면 요새는 외판원들이 절대 안 갑니다. 부인 동의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러한 남자의 왜소함, 역할의 왜소함은 공적인 것. 정의, 비전, 공정, 무언가 먹고 자는 집단이 아니라 의식주의 사적인 집단이 아니라 먹고 자고 옷만 입으면 되는 의식주 집단이 아니라 무언가 사회에 대한 가치가 있고 국가나 민족이나 인류나 하다 못해 환경 파괴나 말하자면 NGO 활동이나 교회 봉사나 이런 데 재미를 붙이면 가족끼리 먹는 것만으로 뭉친 식구들이 아닌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동행자가 되면 절대 헤어지지 않습니다. 저희도 집사람도 문학 하고 나도 문학 하는데 얼마나 많이 살았어요. 지금 보니까 어떤 사람보다 오래 살았다. 아버지 형제보다 많이 50년 넘게. 솔직히 매일 보는 사람이다. 매일 똑같은데 솔직한 얘기로 참 견디기 힘들죠. 그러나 문학을 했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하고, 화장 안 하면 사실 끝난 거다. 사실 저랑 아내는 형제, 아니 자매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 같은 곳에 감동하고 같은 음악을 듣고 즐기고.

젊은 사람들 오면 그런 얘기 합니다. 결혼하고 제일 위험할 때가 3일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할까 말까 하고 눈치 보다가, 이제 내 사람이라고 남자들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신혼여행 간다. 남자들이 야, 너 지금 여자한테 잡히면 평생 잡힌다. 초전에 잡아야 한다. 사진 찍자, 제주도 가면 아무 데서나 찍으면 되는데 여자가 여기서 찍자고 하면 꼭 이쪽에서 찍자고. 왜? 친구들이 한 말이 있거든. 그러면 이쪽에서 저쪽에서 하다가 싸움이 붙죠. 그렇게 해서 3일 안에 제주도에 가서 3일 이혼. 다음에 3개월. 가정을 차려요. 이때까지는 낭만이지만 현실이 됩니다. 3개월 동안 처음 살림 놓고 남자가 코 고는 것도 그때 알고 다 아니까 3개월까지가 힘들다. 그 다음에 3개월 넘기면 3년. 이게 애 낳고 하는 기간이죠. 그 다음에는 애 낳고 3년 넘기면 30년 갑니다. 30년 넘으면 이혼해 봤자 그러니까 그냥 갑니다. 3일, 3개월, 3년만 참으면 되는 것. 이걸 못 참으니까.

그래서 제가 ‘이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거지 절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롭지만 과연 이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혼을 안 할 수 있고 이혼을 안 하고서도 잘 살 수 있느냐를 얘기해 보자. 그러면 가정에서의 대화법, 공통의 취미, 교회에 같이 나가서 대개 남편들 끌려 나오는 경우 많습니다. 타의로 나왔는데 오늘 같은 경우 이재철 목사님 같은 미남 설교자가 있고, 내가 안 믿어도 교회 가니까 재미있더라, 이렇게 해서 공동체가 생긴 것 아닙니까. 부부 같이 오신 분 손 들어 보세요. 벌써 이 교회는 이혼할 뻔한 사람들 많이 구제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이고,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부부가 함께 동행자가 돼서 뛸 수 있는 트랙이 있습니다. 그게 없을 때는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못 삽니다.

이혼 문제를 전문가처럼 얘기해서 안 됐지만 휴대전화 생기고 이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전에는 몰래 전화하고 했는데 이제 휴대전화 생겨서 전화번호 다 나오죠. 요새 아이폰은 지우는 데 하나씩 안 됩니다. 전부 날려야 해요. 아이폰 때문에 이혼 많이 한다고, 다 날리면 이상하잖아요? 정보화 사회 되면 비밀이 없어지니까 이혼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독립해서 살 수 있으니까. 옛날이라면 남편에 얽매여서 사는데. 그런 환경 변화에서 이혼이 늘어난 것이지, 특별히 나빠져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 하느냐 안 하느냐를 따지지 말고 어떻게 하면 안할 수 있고. 이혼하면 어떻게 제2의 인생을, 한 남성과 못 살면 또 그게 그것인데 반드시 성공할 수는 없다. 아예 시행착오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혼 안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삼각형 속에서 아들은 너와 나는 남이지만 자식은 이미 1/2씩 갖고 있으니. 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남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이혼할 거면 애는 낳지 마라. 애를 낳았으면 순위 따지지 말고 삼각형을 유지하라.


(사회자)
박수친 분들 많은데 답답하게 사는 분들이 많으셨나 봅니다. 찌그러진 삼각형, 5순위 6순위 얘기 나왔는데 사실 자식이라면 결사적으로 변한 사람들 많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자식 때문에 어느 동네로 이사가야 된다.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 가정이 파괴되는 거거든요. 같이 사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따로 사는 문제. 이미 이 정도 되면 시부모는 핵가족으로 저기 사셔야지. 성경에는 이런 식의 가족 해체. 부모 자식 문제. 시부모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이재철 목사)
(잠시 머뭇거린 뒤) 성경이 부모 자식 가족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식의 의무에 대해서는 몇번 말하지 않는다. 사실 좋은 부모가 되라는 것. 예를 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얘기하시지만 몇 번 밖에 없습니다. 왜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먼저 명령하느냐. 자식이 있기 전에 부모가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식을 만들죠. 좋은 부모 밑에서 나쁜 자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좋은 부모가, 좋은 믿음의 부모가 바른 믿음, 가치관, 인생관 가지고 살면 자식들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1차적인 교육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가정 문제, 이것은 결국 남편과 아내의 문제이고 바꿔 말하면 부모의 문제죠. 모든 부모의 문제가 자식의 문제로 바뀌어지고 사회 문제로 증폭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부모가 나이들어 가면서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나이는 들어가는데 나이 먹는 노인으로만 바뀌는 것. 사람에 대한 호칭이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막 태어나면 영아, 유아, 청소년, 청년, 장년 넘어가는데 그 다음에 갈림길에 들어습니다. 노인이 되는 길이 있고 어른이 되는 길이 있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과의 관계에서 어른으로 시작해서 어른으로 지속되고 어른으로 완성돼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른이 되느냐 노인이 되느냐 그 분기점은 내가 나를 더 생각하느냐 상대를 더 생각하느냐 바로 거기서 갈라집니다. 그래서 노인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 알죠. 그런데 그런 분들은 나이가 들어서만 아니라 젊어서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이기심의 틀 속에 집어넣는 것이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데 자기 욕심을 위해 자식을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해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가 노인이 되면 그 노인이 건강할수록 자식들은 괴로워집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남을 위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는 것이죠. 20대 때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30대 때는 이해하고 30대 때 이해 못하던 것을 50대 60대 때 품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곁에 있으면 그 분이 설령 병상에 누워있어도 주위는 훈훈해집니다. 어른은 모두 덮어주고 자기 것으로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정말 어른의 모형이십니다. 어른 중의 어른.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진 것 내 인생의 경륜 모든 것으로 내 자식을 위해 이웃을 위해 거름이 되어준다 그러면 사실 가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는 빈도가 훨씬 줄어듭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부모의 문제이고 부모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첫째는 몸과 마음이 같이 늙어가야 한다. 같이 나이 들어야 합니다. 나는 60대인데 마음은 20대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60 되신 분이 20대 며느리를 보고 그 시어머니가 20대 마음을 갖고 있으면 20대 며느리가 경쟁자이지 어떻게 딸입니까. 사랑할 수 없습니다. 60대 되고서도 40대 마음 갖고 있으면 40대 아들에게 일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다툴 수 밖에. 우리가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잠언서 16장 31절처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 절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훈장이죠.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이 그만큼 커지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그늘이 된다는 증거가 되는데 마음이 늙지 않으려 하면 그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그 가정은 여러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정말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자식들을 품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청지기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 내가 종착역이 아니고 통로일 뿐이다. 떠나갈 때 다 두고 가는 것.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베풀고 해서 어른이 되었다면 그 가정은 정말 건강한 가정 될 수 있습니다. 아는 공직자 중 한 분이 은퇴하고 나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이런 이야기 하셨습니다. 평생 공직자로 살고 은퇴하고 나서 일평생 달리다 멈춰서 자기를 돌아보니 아, 내가 3가지 몰랐구나. 첫째 모른 것이 인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 철없이 평생을 뛰어왔구나. 인생이 뭔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좀 알아야겠다. 신을 알아야 나를 알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두 번째가 내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 평생 아내와 대화 한번 못해봤다는 거죠. 아내와 여행도 하고 의지를 갖고 대화도 하고. 세 번째가 베풂을 알아야겠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였다. 진급하기 위해 짓밟고 올라가다 보니 베풂을 몰랐다. 바꿔 말하면 세 가지가 바른 어른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

젊었을 때부터 모든 부모가 어른의 마음으로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큰 그늘이 되고 어른이 되면 그 그늘의 자식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이 자식을 맡겨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가꿔 나간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소망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항상 수천년 동안 살면서 두 착각 속에서 산다. 하나는 자기 세대가 가장 과학이 발달됐다고 믿고, 하나는 자기 세대가 가장 타락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어떤 시대든지 이 시대가 가장 가정이 문제고 도덕이 부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성경 봐도 그렇죠. 하나님 말씀 안에서 다 회복되는데 누가 먼저 회복돼야겠는갸. 자식이 아니라 믿는 부모입니다.


(사회자)
이 교수님 말씀 들으면 우리가 걱정하는 게 죄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고부간의 갈등이 여전히 있는데요.


(이어령 박사)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이 식구 먹는 것을 해결하는 수단이냐 아니면 생식하는 수단이냐 하는 것. 그리고 아까 말한대로 생식이나 밥을 먹는 것 외에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조상을 위한다든지 안에 경제적인 것이 기준이 되지만 가난한 집도 제사는 꼭 지냈죠. 현재 산 사람 입도 제대로 간수 못하는데, 줄줄이 제사 지냅니다.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달리 생식만 하는 유전자적 존재도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고, 마지막 남은 것이 뭔가 다른 것, 그것을 하고 살아가는 건데 이것이 없으면 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떼나 짐승과 같은 무리죠.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개인화입니다. 가정이 최소한의 집단인데 개인화가 심해지니까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살고 부모도 모시지 않고. 4형제가 결사적으로 골프를 쳐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지는 사람이 아버지 모시기로 했다. 사회적으로 4형제가 골프 치면 유복한 편인데, 오히려 살만 하니까 이렇게 됐습니다. 사실 외국 같으면 자손들에게 주지도 않고 우리처럼 교육시키고 빚 내가면서 그렇게 했으니 받으려 하는 거죠. 준 게 없으면 받을 게 없으니 사회가 책임지는데. 우리는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정도 사회화 됐으면 국가가 노인들에게 베풀어야죠. 노인들이 혼자 병 나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서양은 자식들이 불효하지만 국가가 그 부분을 메꿉니다. 우리는 아직 가족이 사회화와 대립되는데. 생존경쟁하고 싸우고 피투성이가 돼서 쉴 곳은 유일하게 가정 뿐. 생존경쟁이 심할수록, 시장화될수록, 외로울수록 가정은 있어야죠. 그러니 산업화되기 전에 오히려 귀찮았을 수 있다. 그렇게 많은데.

그런데 여러분들이 착각하면 안 되는게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아버지가 자식 얼굴을 몰랐어요. 신사답게 잘 생겼네 하는데 당신 아들입니다 하는 거에요. 전연 관심이 없었다. 자식 키우는 데 어머니도 관심 없었다. 프랑스 파리는 아들을 고아원에 다 내버리고. 아이들은 모두 외가에서 키웠다. 이러한 제도들이 오늘날과 같은 산업주의, 아까 삼각형 생긴 게 산업화 생긴지 2백년도 안 된 이야기죠. 출산권은 옛날에 문중에 있었다. 아이 안 낳으면 큰일나죠. 내쫓기죠. 지금 출산권은 여자에게 있습니다. 여자가 정말 애 낳고 싶어서 낳는가? 문화로 훈련받은 거지 실제로는 낳고 싶지 않다. 증거로 병오년에 애 낳으면 시집 못 간다 하는데 미신이다 해서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1966년인데 60년에 한번씩 온다. 가짜라고 방영했는데 출산율이 거꾸로 최하 14%가 됐습니다. 구실이 생긴 거죠. 괜찮다는데 남편 보고 백말 띠에 낳으면 큰일난다고. 무의식적으로 낳고 싶지 않았던 거에요. 논리적으로 안 낳은 것이 아닙니다. 빌미를 삼은 거죠. 말로 안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애 낳고 싶지 않았다. 슬픈 얘기지만 어머니가 애를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다 주입된 문화일 수 있죠. 아니다. 낙타의 눈물이라고 얘기했는데 낙타가 애를 낳으면 젖을 안 주는 어미들이 있다. 모성애는 꾸며낸 신화라는 거에요. 우리가 입덫 한다. 완전히 망가진다. 애 때문에. 식물은 꽃이 피면 잎사귀고 뭐고 다 없어진다. 무서운 것. 개체와 개체간의 싸움. 이런 얘기 할 건 아닌데 세속의 지성은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영성이 필요해요.

옛날에는 당연시하던 모든 것이 신화라는 거죠. 그래서 동물 봐도 모성애가 없다. 낙타가 가혹한 사막에서 저만 살라고 새끼가 젖 달라고 오면 발길로 찹니다. 그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데려다가 낙타에게 노래 불러주면 다시 눈물 흘리면서 젖을 줍니다. 모성애를 불러 일으키는 거죠. 이런 것 생각하면 기독교는 다 포함해서 원죄라고 한다. 하늘에 나는 새 봐라. 들에 나는 백합화 봐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걱정하느냐. 2천년 전에 말씀하셨는데 지금가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다들 고민합니다. 이 고민이 과학, 시장, 경제를 낳았습니다. 저번에 필리핀 여성 이멜다 여사 구두가 3천켤레라고 했습니다. 평생 신어도 못 신는데, 이걸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죠. 앞을 달린다는 이들이, 그거 그렇게 중요한 것 아니다. 먹는 돼지, 새끼 치는 돼지, 아니다. 마지막 제례 공간이 있다. 가치의 세계가 있다. 이것이 없으면 하우스(house)지 홈(home)이 아니다. 하우스와 홈은 전혀 다르다. 하우스는 벽돌로, 홈은 사랑과 믿음으로 만들어 진 거죠. 아무리 기가 막힌 집을 지어도 내 집이 있다고 내 가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우스를 홈으로 만드는가. 집의 하드웨어(hardware)에 사랑과 믿음이라는 가치의 소프트웨어(software)를 어떻게 집어넣느냐.

시간도 많이 갔는데. 박목월 선생이 문학 속에 나타난 아버지 심정을 표현합니다. 옛날에 쓴 건데 이걸 보면 여기서 제가 말하려 하는 가정이 얼마나 변했느냐. 읽어보고 문학으로 보면 이런데 바이블로 보면 어떤가.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 가정

박목월 선생이 아주 옛날에 쓴 시입니다. 조심할 것은 왜 자기를 십구문 반의 신발로 표현했나. 자기 막내는 가장 작은 신발로. 이게 가정의 고독. 같은 방에 사는데 사이즈가 다 다르다. 똑같은 신발이었는데, 피를 나눈 부부 사이인데, 한 몸 같은데 아내의 신발을 내가 못 신는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죠. 아무리 가까워도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외로운 실존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아도 틈이 있습니다. 내 아픔 대신할 수 있나? 내가 머리가 아플 때 어머니가 이마를 짚어주지만, 어머니의 차가운 손이 내 뜨거운 이마를 느끼는 거죠. 타인의 손을 통해 느끼는 것은 내 뜨거운 이마. 어머니를 통해 보는 것은 나지 어머니 자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죄이고 실존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외로움이다.

가족이 완벽하다면, 어머니 아버지 내가 완벽하다면 종교 안 믿어도 된다. 그런데 일찍 죽으며 사랑하는 자들 헤어지고 형제끼리 서로 싸웁니다, 가인과 아벨처럼. 이것이 원죄이고 가족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현세적 가치만 가지고는 절대 가족은 성립이 안 됩니다. 짐승의 무리, 먹는 것 가지고 경쟁하는 집단일 뿐이죠. 집안에 어떤 핏줄 있느냐, 어떤 향기 들이느냐, 어떻게 내가 낮아지고 튼튼한 삼각형 만들어지느냐? 인간의 힘으로 힘들다. 이걸 초월하는 것이 상상력, 직관, 믿음. 저는 문학이라 생각해 왔지만 그것들이 가정의 파탄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데 가인과 아벨 때부터 형제를 서로 죽였습니다. 북한하고 남한하고 왜 싸우냐 형제 지간인데. 아무리 북한이 우리 동포라 싸우지 말자 해도 성경 보세요. 인류 최초의 형제가 죽였다. 이게 현실입니다. 형제니까 사랑해야 하는데 형제끼리 죽였어요. 이것이 원죄이고 에덴동산 쫓겨났을 때 우리의 실존입니다. 박목월 선생의 문수가 서로 다른 것들이 9켤레 신발 흩어져 있는데 한 집 위에 산다. 서로 다른 문수들이 한 지방에서 사는 이 역설과 아이러니. 이것을 뛰어넘는 게 나의 미소. 기쁜 미소인가. 아주 적은 웃음이다. 이 신발이 오죽 닳고 달았겠느냐. 아버지처럼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애들에게 아버지는 어설프다. 한번 나가면 안 들어온다. 가난한 집안인데, 안전등이 켜진다고 했죠. 마지막에 가서 미소하는 내 얼굴을 봐라. 이 미소는 절대 말로 표현 못한다. 어설픈 존재가 아니고 내 신발만 온 거죠.

이 아버지가 CEO일 수도 있고 많은 성도들 이끄는 목사님일 수도 있고, 책임지고 있는데 해결이 안 되는 거죠. 가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의 집단으로 수천 년 됐어도 기본적인 공동체다. 끝없이 가인 아벨 싸움처럼 싸우고 요셉과 형제들처럼 내던지고 죽이고, 이런 것들이 계속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말자 상속했습니다. 왜? 형들이 재산을 주면 흥부 놀부처럼 동생들 다 죽이니까. 다 독립시키고 마지막 막내에게 상속했습니다. 한동안 가족은 역사상 한 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목하거나 절실한 문제가 있었지만 옛날부터 너와 나의 문제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제대로 공동체를 못 이뤘다. 이것을 어떻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드느냐, 이것이 바로 성(聖) 가족, 하나님의 가족. 거기도 삼위일체이지만 우리도 삼각형입니다.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서 삼위일체가 되는. 위기에 처한 가족을 견딜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삼위일체가 되냐. 가족을 어떻게 회복하냐, 문명을 어떻게 회복하냐. 저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섰다. 뭐 하고 뭐 하고 다 했지만 해답이 없기 때문에 영성으로 가 보면 혹시 마지막 희망이 거기 있는 게 아니냐. 제가 상당히 변했다. 이 밤중에 저같이 이기주의적인 사람이 이러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이렇게 변하잖아요.


(사회자)
지금 이제 말씀 끝에 이 문제는 영성에서 해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재철 목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카멜이라는 예쁜 동네가 있는데 2백년 된 수도원이 있습니다. 박물관에 수도사들이 쓴 글들 책들 여러 가지 진열품들 있습니다. 그런데 벽에 샌들이 두 켤레 걸려 있습니다. 제가 그 신발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쓰는 물건은 모든 물건에 존재의 인격이 배어있기 마련입니다. 신발보다 더 한 인간의 인격을 더 우리에게 리얼하게 보여주는 물건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신발을 보면 그 분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는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신발이 더 리얼한 것은 그 존재가 빠져나간 텅 빈 신발이 고독을 상징합니다. 2백년 전 그 황량한 벌판에서 수도사들이 저 샌들을 신고 나름대로 예수의 길을 좇기 위해 얼마나 고독과 치열하게 싸웠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처음 하신 말씀이 신을 벗으라. 그 신발은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기도 하지만, 너의 그 고독한 존재의 고독 자체를 나에게 내 놓으라. 내가 너의 그 고독을 내 사랑 생명 소망으로 채워 주겠다. 그 이전까지 그의 신은 고독한 한 실존의 상징. 하나님께서 채우심으로 그 신을 다시 신고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 인생이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 수도원 신발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은 수도사의 고독을 봄과 동시에 그를 채워주셨던 하나님을 가슴 진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21세기 현대인들이 다 고독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채워질 수 없죠. 절대 혼자로 태어났습니다. 고독한 존재끼리 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더 황폐합니다. 이 고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으로 소망으로 채워가면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우리 가정이 회복되고 개인의 삶이 회복되고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가 회복되고 시대가 회복되는 것이죠. 성경이 주는 메시지가 그것이라 믿습니다.


(사회자)
이어령 선생께서 혹시나 길이 있지 않나 생각해서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셨는데 해답에 접근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어령 박사)
전에도 얘기했지만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동족이라고, 레위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랍비 제사장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도둑을 만나 피를 흘리고 쓰러졌는데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이웃이라 할 수 있겠나. 피가 다르고 지위가 달라도 사마리아인들, 예루살렘도 못 들어가는 배척받는 사람이라도 내 상처를 기름부어 주고 갈증나는 내 목을 축여주는 사람이, 누가 이웃이라고 하겠느냐. 가족이라는 게 뭐냐? 피를 나눈 가족, 생물학적 가족만 가족이라 할 수 없다. 이웃이 가족이다. 공동체다. 가족이라 해도 피를 흘리고 쓰러졌는데 그냥 지나친다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라 할 수 있느냐.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내가 아파 쓰러졌을 때 일으켜 주면 그게 가족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 보면 가족주의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너무 화날 때가 있다. 1백살 돼서 겨우 애 한명 낳았는데 그걸 번제로, 너무 잔인하잖아요. 나는 그 예 하고 죽이러 데려간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지만 좇아가는 젊은이가 기분이 어떻겠어요. 입다 그 사람이 자기가 물론 한 거지만 내가 갈 때 제일 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 제일 먼저 기쁘게 나오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지. 자기 딸이었습니다. 그렇게 반갑게 나오는 가족. 끌고 가서, 오해했습니다. 이럴 수 있는가.

그런데 더 큰 가족. 진짜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가 혈연으로 보는, 핏줄로 보는 세속적인 가족 그 이상의 것들이 있습니다. 핏줄만 가진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거기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핏줄 플러스 알파일 때 진정한 혈족이다. 사실 오늘 제가 고백하려고 예수 믿기 전에 쓴 시 가져왔습니다. 믿을 때와 믿기 전이 어떻게 가족관이 다른가. 결론에 가까운.

보아라 파란 정맥만 남은 아버지의 두 손에는 도끼가 없다.
지금 분노의 눈을 뜨고 댓문을 지키고 섰지만
너희들을 지킬 도끼가 없다

어둠 속에서 너희들을 끌어안는 팔뚝에 힘이 없다고 겁먹지 말라
사냥감을 놓치고 몰래 돌아와 훌쩍거리는
아버지를 비웃지 말라
다시 한 번 도끼를 잡는 날을 볼 것이다

2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최초의 돌도끼
멧돼지를 잡던 그 도끼날로 이제 너희들을 가로막는
이념의 칡넝쿨을 찍어 새 길을 열 것이다

컸다고 아버지의 손을 놓지 말거라
옛날 나들이 길에서처럼 아버지의 손을 꼭 잡거라
그래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차린 저녁상 앞에 앉을 수 있다

등불을 켜놓고 보자
너희 얼굴 너희 어머니 그 옆 빈자리에 아버지가 앉는다
수염 기르고 돌아온 너희 아버지의 도끼 한 자루

-도끼 한 자루, 이어령

아버지가 신의 역할을 하고 싶을 때, 애들을 내가 아니면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 무엇으로? 폭력의 도끼로. 힘이 없으면, 세속의 파워가 없으면 먹여살릴 수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능해. 그때는 예수 믿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국회의원 되고 장군 되고 이런 아버지를 둬야 이 집안이 지켜지는 줄 알았을 때 쓴 시입니다. 지켜줄 것이 없다. 그러나 봐라, 언젠가 멧돼지 잡던 도끼로 지켜줄게. 그리고 어머니의 밥상 차림. 평화로운 가족을 내가 지켜줄께. 이때만 해도 힘없는 사람은 내 손으로 내 가정을 지킬수 밖에 없고. 그때 믿을 것은 도끼라는 권력, 돈, 힘. 힘없는 아버지들, 고개숙인 아버지들에게 다시 파워를 길러 꼭 온다. 수염 기른 아버지, 권위있는 아버지죠. 세속적인 의미에서 아버지가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할 때의 처절한 슬픔을 끝내자.

하지만 믿는 사람은 아주 약해 보입니다. 온유한, 힘없어 보인다. 굴욕을 당한다. 그런데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힘이 드는데,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아버지가 근사하게 입고 요즘 좋은 차 타고 왔을 때 우리 아버지 믿을만 하다 밥은 안 굶겠다 하는데. 착하고 집사님 장로님이라고 하는데 힘은 하나도 없고 기도하자. 애들이 못 쫓아옵니다. 이 구렁을 어떻게 메꾸느냐 하는 데서 결론이 나옵니다.

늑대보다 강한 양을 만들자. 늑대한테 잡혀먹는 양 되지 말자. 그런데 늑대하고 싸우다 우리가 호랑이가 되지 말자. 대신 이제는 절대 약한 양, 쫓기는 양, 늑대한테 목 내미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없어도 내 힘으로 강력한 늑대를 이기는 양이 되자. 이게 오늘 같은 험악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의 살 길이다. 옛날 성자들처럼 제물로 바쳐지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믿음만으로는 살기 힘든 때가 왔다. 그러니 공부도 하고 기술도 쌓고 연구도 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렀을 때 가족이라는 세속 공간을 지킬 수 있다. 그게 가치 있지는 않지만 지킬 수 있다. 그런데 도끼는 아니더라. 안 믿었을 때는 그게 도끼였는데 믿고 보니 도끼가 아니더라. 무지개거나 꿈이거나 안개거나 무언가 아이들이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고 가슴 두근거리는 눈으로 봐야지 도끼 가지고 무시무시한 것으로 안심 못 시키더라. 도끼 대신 우리 아버지 손에 무얼 들었으면 좋겠냐. 이것이 오늘 대담이 끝나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비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자)
이어령 선생님께서 그 돌도끼 대신에 늑대보다 더한 늑대, 호랑이보다 더한 호랑이가 아니라 꿈이나 무지개, 그런 것이 되어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끝으로 목사님, 우리가 믿으면 그 안에 믿음이 있고 꿈이 있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습니까.


(이재철 목사)
선생님 말씀이 예수님 말씀과 동일하죠. 예수님 말씀이 너희들은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런데 뱀처럼 지혜로우라. 순결 속에 지혜가 가고 지혜가 또 순결하게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것은, 뱀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게 하죠. 그런 지혜를 가지라. 이걸 이어령 선생님 식으로 표현하면 늑대보다 강한 양이 되자. 우리가 순결하고 지혜로운 길 가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지성인이었고 가문과 혈통도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이것 다 배설물이다, 황제의 길을 갈 때는 굉장한 길이었는데 영원의 길에서는 다 배설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할 때 하나님 능력이 드러나고 그때 순결과 지혜의 도구를 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가운데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역시 우리가 가는 길 자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길이기 때문에 황제의 길에서 갖고 있던 것을 도구로 쓰는 것이죠. 그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었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힘이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도구로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순결과 지혜의 길 간다고 하면 죽음을 깨뜨리시고 살아나신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박수).


(사회자)
지성과 영성의 만남. 첫 번째는 삶과 가족을 중심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아는 것은 사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사는 것이 참 어렵죠. 사는 게 어렵습니다. 어려운 걸 해내야 감동과 감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김연아 선수에게 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했기 때문이죠. 우리가 잘 믿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지성과 영성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길 바랍니다. 

by 제이콥림 | 2011/08/26 10:54 | 지성과 영성 만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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