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교수와 이재철목사의 ‘ ‘문화로 성경읽기’


양화진문화원서 이어령교수와 이재철목사의 ‘지성’과 ‘영성’ 대담 지상중계- 문화로 성경읽기



“세속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떡을 의식주를 포함한 물질전체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만 사는 삶 제시


양화진문화원은 이어령교수와 이재철목사의 지성과 영성의 만남 대담을 지난달 24일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가졌다. 문화로 성경읽기를 주제로 열린 이날 대담은, 올해 양화진 강좌의 세 번째 행사이자, 올해 마지막 대담이다. 이번 대담은 이재철목사가 사회자로 대담을 이끌고 질문했으며, 이어령 교수의 답변과 이재철목사의 신학적 설명으로 이뤄졌다. 이어령교수와 이재철목사는 말씀과 빵이란 주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떡의 의미를 해석했다. 떡을 빵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으며, 여기서 말하는 빵을 음식으로 한정하지 말고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세계 전체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어령 교수 “예수님은 죽지 않는 떡이 여기 있다고 하시면서, 내 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 왜 죽는 떡을 좇느냐고 말씀하신다. 빵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고 신도끼리 싸움하는 곳이 많다”


이재철 목사 “이 시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이뤄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딱 하나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 하나님만 볼 수 있다”


‘통시’는 시간 흐름, ‘공시’는 구조적

이재철·기호학용어 중에 ‘공시적’, ‘통시적’이란 용어는 생경하다. 쉽게 한 번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이어령·선택과 결합이라는 뜻만 알면 된다. 결혼은 많은 여성 가운데 한두 명만 선택하는 것이다. 그 선택은 공시적인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시간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통시적이라고 하고, 공시적은 같은 계열인 여러 개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통시와 공시가 이어진다. 통시적인 것의 나열 속에서 역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통시적으로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와 헤겔 같은 사람들이다. 공시적으로 보면 선악의 구분이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의하면, 인간은 끝없이 진화하는 통시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항상 변하고 기승전결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재철·통시, 공시용어를 선택과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했는데, 가령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시대에 국한되어서 그 언어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공시적이고, 언어 한 단어, 용어가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변화되어 왔는가를 따지면 통시적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

이어령·꼭 그렇지는 않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은 역사를 변증법 등의 관점에서 진화, 발전의 측면에서 보지만,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구조주의라고 해서 근본은 같다고 본다. 이번 강의를 통해 공시성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시는 변화적이고 공시는 구조적이다.


떡은 대유법을 활용해 해석해야

이재철·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신다. 본문에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다. 그런데 말로 유혹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마귀가 말로 예수님을 유혹, 시험했고 말씀으로 답변하고 물리치셨다. 이것은 말과 말의 대결이다. 말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는다. 기호학에서는 말을 어떻게 평가하나.

이어령·마귀는 대단히 연극적이었다. 돌덩어리를 주면서 이걸로 빵을 만들어보라고 할 때, 돌과 빵은 말이 없어도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다. 우리가 말하는 말과 로고스의 말은 천지차이다. 태초의 로고스는 현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고 기록하시되’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용한 것이다. 율법이나 성서는 모두 기독교문자이다. 성서를 읽어보면 빵과 말씀은 대조된다. 마귀는 네가 정말 하나님을 알거든 대답해 보라는 의도였다. 이런 면에서 이 구절을 떡이라고 번역하면 치명적이다.
이재철·우리나라는 성경이 처음 들어왔을 때 빵이 없었다. 그렇지 않나?

이어령·그래도 빵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빵이 성경의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뒤에보면 효모가 들어간 발효된 떡, 발효되지 않은 떡이런 것들이 나온는데, 떡에 효모가 왜 들어가나. 이런 것들을 몰라서 잘못 번안하면, 전체 상징코드가 틀려진다. 번역 불가능하므로 빵을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르쳐줘야 한다.

이재철·예수님은 40일을 주렸다. 마귀가 말한 빵은 중동사람들이 먹는 둥글고 두터운 빵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떡이라고 번역했다. 잘못된 번역과 아울러서 첫 번째 시험에 대비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어령·레토릭은 시내도키라고 해서 대유법을 말한다. 상위개념으로 하위개념을 나타내거나 반대인 경우를 말한다. 빵과 서커스란 시가 있다. 로마가 망할 무렵에 복지포퓰리즘이 있어서 빵을 무료로 공급하고 검투사를 데리고 공연하는 등 빵과 서커스만 주면 정치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꼬는 시이다. 여기서 빵은 빵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말한다. 빵은 말씀과 대립한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다. 우리는 물질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떡은 빵처럼 전체 물질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떡으로 번역하면 의미전달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놀랍게도 빵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오병이어기적을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려고 하는가? 떡, 빵만이 존귀하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세속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오셨다. 그것은 죽음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생을 준다.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떠올려보라. 예수님은 죽지 않는 떡이 여기있다고 하시면서, 내 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 왜 말씀을 놔두고 죽는 떡을 좇느냐고 말씀하신다. 빵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고 신도끼리 싸움하는 곳이 많다. 빵만 먹고 만족하면 절대 교회내의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나지 않는다. 빵을 주고 만족하면 으레 다른 것을 구한다. 인간은 쾌락을 쫓는다.

사람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스마트폰, DVD 등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먹는 것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히 사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한다. 먹는 빵과 말씀이 대조된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한군데에서도 하지 않았다. 빵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속을 버리면서 말씀으로 사는 삶

이재철·오병이어의 표적이나 돌멩이로 떡을 만드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말씀을 목적으로 사는 삶이 기적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한 내용은 먹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삶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 말씀을 보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사도행전 9장이 생각난다. 사도행전은 청년시절 사울의 회심장인데,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시력을 상실했다. 다른 사람 손에 이끌리는데 유다라는 사람 집에 사흘동안 시력상실 상태로 있게 된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의 안수기도로 다시 시력을 되찾고, 세례받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록인데 그 단락은 “사울이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짐이라”로 끝난다. 이 구절은 굉장히 중요하다. 헬라어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단어가 있는데,

사울이 음식을 먹었다는 ‘람바노’이다. 람바노가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음식이 아니라 생명을 취한다는 것이다. ‘강건해지니라’는 뜻의 ‘엔이스키오’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안에’라는 뜻의 ‘엔’과 ‘힘이 있다’라는 뜻의 이스키오가 합쳐진 말이다. 엔이스키오는 ‘힘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사울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취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변했다. 그래서 강건해졌고 하나님의 희망에서 살게 되었다. 바울은 어제 먹는 것과 오늘 먹는 것의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달라졌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달에 선생님이 이야기한 달리다쿰을 보면, 아이를 살려주시고도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먹을 것은 인간 너희들이 주라는 것이다. 소녀가 먹는 목적이 달라진다. 가족들이 먹는 목적이 달라진다. 생명을 먹는 목적으로 산다.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목적으로 삼고 말씀이 주는 힘으로 살면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

이어령·빵을 먹으면 배부르다. 보면 덩어리진 것이니까 느낌이 있다. 그러나 말씀은 귀로 눈으로 가슴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아작아작 씹어서 먹어야 한다. 두껍고 딱딱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씹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찢어주면서 “이것이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다. “전부 먹어라.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간다. 빵과 포도주 모두 먹어라”라고 하면서, 말씀을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재철·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시편에서는 말씀이 송이꿀보다 달다고 했다. 에스겔도 두루마기를 먹고 전하라고 했다. 어린아이는 젖을 먹지만 성인은 단단한 것을 씹어먹다. 우리가 빵(세속적인 것)문제는 몰입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왜 제대로 안되나. 빵은 보이지만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안보이신다.

마귀와 예수님만 있는 이 시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이뤄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딱 하나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 하나님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보여서 세상 것만 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유혹은 “너를 과시하려면 뛰어내려라”는 의미의 유혹이었다. 그러므로 전제조건이 틀렸다.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시험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의 왜곡을 그만하라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거주할 때도 뱀이 말씀을 바꿔서 왜곡하고 유혹했다. 사도바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에베소교회의 안수를 준 장로를 초청해서 유언할 때 “너희들 가운데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나올 줄 안다. 너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된 말을 가르칠 자가 나온다”고 말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하려하지 않고 내가 내 마음대로 잘 유지하는 주인이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 말씀에서 실족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그 때에도 말씀으로 유혹이 안되니까 천하만국을 보여줬다. 마귀는 나한테 경배하라고 했는데, 다시 예수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오직 너의 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다. 경배하라는 단어가 예배하라는 말이다. 경배는 노예가 주인의 발에 입맞추는 동작이다. 섬기라는 말도 같은 의미인데, 섬기는 대상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결국 물질과 하나님의 말씀 둘 중에 하나만 섬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by 제이콥림 | 2011/12/05 10:03 | 지성과 영성 만남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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